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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말문트기
작성자 :  장은경 작성일 : 2013-02-22 조회수 : 2770



중국어 말문 트기

 

장 은 경

 

1992년 유월 어느 날이다. 나는 큰이모와 함께 대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 무렵 나이는 25살이지만, 몸과 마음은 사회생활에 시달려 지칠 대로 지쳐 있어서 늙고 기운 빠진 노인과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또 하루가 시작 되었구나 하고 한숨과 걱정만 밀려 왔다. 삶이 재미도 없었고 특별할 것도 없었다. 큰 이모가 이끄는 대로 흔들리는 기차에 올라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창 너머로 초록빛 들판과 싱그러운 유월의 풍경이 펼쳐진다.

 

동대구역에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 넷째 이모 집으로 향했다. 넷째 이모는 어디 가셨는지 안계시고 이종 사촌 오빠와 동갑내기 여동생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특별히 바쁜 일도 없고 해서 며칠 이모 댁에 머무르기로 했다. 가져온 여분 옷이 없어서 여동생의 체육복 바지와 헐렁한 면 티를 얻어 입고, 이모들이 나가시자 청소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쉬고 있었다. 낮에 사촌 오빠의 고향 친구라며 한사람이 놀러 와서 몇 시간 바둑을 두고 갔다. 우리 집은 아니지만, 과일이 있어서 예쁘게 깎고 차도 끓여서 오빠들에게 차려 주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틀 뒤에 사촌 오빠가 머뭇거리며 내게 며칠 전에 놀러온 친구 어떻더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 인상은 좋던대요 라고 한 것이 새로운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날 이후로 오빠의 친구는 이모 집에 자주 놀러 오고, 나도 예정에 없던 이모집살이가 시작 되었다. 내가 머무는 동안 넷째 이모는 나의 됨됨이며, 성실함, 살림살이까지 눈여겨보시고는 그 오빠와 결혼하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그러면서 아가씨가 공부하고 싶다고 하면 결혼하고 유학도 같이 보내준다고 하셨다.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엄격하고 고지식한 아버지 밑에서 숨도 못 쉬고 사는 것보다 자유로울 것 같았고, 하고 싶은 공부도 시켜 준다고 하니 다른 것은 잘 되겠지, 안되면 열심히 하면 되고 하는 생각에 석 달도 안 되서 우리는 결혼을 했다.

 

결혼하고 바로 유학을 떠나려고 했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는 공산국가인 중국과 수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비자 발급이 까다로웠다. 다행히 내 졸업장과 서류가 증빙서류가 되고, 92년 9월 학기가 시작되고도 두 달 뒤인 11월에 상해 중의약 대학에 입학했다. 다른 유학생들은 이미 9월부터 입학해서 중국어를 잘하는 대선배처럼 보였다. 우리 부부는 중국어 사전 하나와 회화 책 하나만 들고 용감하게 유학을 온 것이다. 난 사실 안녕하세요(니 하오)라는 인사말도 모르고 온 초보 중에 왕초보였다. 그래도 믿는 것은 한자를 좀 많이 알고 있고 영어를 좀 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는 언제쯤이면 먼저 온 유학생들처럼 저렇게 말을 잘할 수 있을까 내심 불안했었다. 한 달 뒤 학기말 시험에 통과하려면 주관식, 객관식 문제 모두 중국어로 시험을 봐야 했기에 가는 날부터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수업 시간에 아는 것이 없으니 자연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수업 마치고 시장에 가서 물건 살 때도 뭐라고 말하고 물건을 사야할 지 몰라서 온갖 바디 랭귀지로 한 달을 버텼다. 두려웠다. 다른 나라에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았더라면 준비라도 철저하게 했을 텐데.

 

중국어를 잘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잘 들어야 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들으려고 했다. 한어를 가르치는 왕 선생님과 장 선생님께서 천천히 중국어 회화, 문법과 문장 구조를 설명하시는 것이 벙어리 생활 일주일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잘 들리고 따라하고 싶어졌다. 수업 시간에 유학생들에게 돌아가며 인사말과 자기소개를 시킬 때, 처음에는 두렵고 무서웠는데 점차 발음도 교정되고 성조도 익숙해지면서 한 달이 흘러갔다. 중국어의 문장 구조는 영어와 비슷하고 발음 기호는 영어로 표기되어 있어, 부지런히 사전 찾고 성조에 맞춰 외우면 해결되었다. 이제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문법을 설명하시고, 못 알아듣는 한국 학생들을 위해 내가 통역해서 설명할 수 있는 단계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마치 5살에 한글을 배운 아이가 천재라고 불리다가 초등학교 들어가면 수준이 같아지듯이 한국 유학생들의 한어 실력도 12월이 되자 모두 비슷해졌다.

 

문제는 기숙사 밖으로 가면 표준말인 북경어를 쓰지 않고 상해 방언을 쓰기 때문에,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살려면 아직도 두렵기만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60년대 그랬듯이 야채나 고기 모두 천칭 저울에 매달아 판다. 한쪽에는 추를 달고 다른 한쪽에는 물건을 매달아 근으로 팔기 때문에, 감자 몇 개를 살려고 해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좋은 감자를 말없이 저울에 담고는 표준말로 얼마에요(뚜오 쌰오 치엔)라고 묻고는 돈은 지폐로 지불하고 잔돈으로 받았다. 그러다 보니 얼마 안가서 지폐는 다 쓰고 동전 통에는 동전만 한 가득이었다. 우리나라 말이 경상도와 전라도가 조금씩 다르듯이 중국에는 북경어 이외에도 각 도시마다 특유의 말투와 억양, 접미사, 바디 랭귀지가 있으니 오죽 했을까? 나중에는 차츰 익숙해져서 동전은 종류대로 분류해서 시장가거나 수퍼 갈 때 다시 사용할 만큼 자신감이 생겼다.

 

상해 유학 시절, 돌이켜 보면 하루하루가 좌충우돌 중국어와의 전쟁이었다. 나는 성격상 단어나 성조가 분명하지 않으면 어디를 가도 말하지 않았고, 남편은 무조건 말하고 성조를 끼워 맞추곤 했다. 어느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택시를 타고 시내를 가자고 해야 하는데, 기사가 어디로 가냐고 묻자 남편은 틀린 발음과 성조로 목적지를 얘기했다. 기사는 다시 목적지를 물었고, 남편은 다시 틀리게 말했다. 보다 못한 내가 무거운 입을 열어서 정확한 발음과 성조로 얘기하자, 기사는 백미러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중국인이냐고 물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내 가서 책도 사고 쇼핑을 하고 기숙사로 돌아 왔는데, 남편은 그 일이 신기했는지 한동안 기숙사에서 유학생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하곤 했다.

 

이미 모국어에 익숙해진 어른이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단기간에 익히고 배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려고 하면, 직접 그 나라에 가서 1년만 벙어리처럼 입은 다물고 두 귀는 활짝 열고 생활하다 보면, 말문은 저절로 트인다는 것을 몸소 체험을 통해 배웠다. 국내에서 백날 해봐야 실제로 그 나라 사람을 만나면 머릿속으로는 할 말은 맴도는데, 실제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도 못하고 웃기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질 않는가?

 

왕 선생님과 장 선생님은 비록 나와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고 다른 문화권에 살고 계셨지만, 열심히 중국어를 배우려고 하는 왕 초보였던 나에게 애착을 가지고 잘 이끌어 주시고 가르쳐 주신 고마운 분으로 기억된다. 그 두 분이 없었더라면 그 해 나는 모든 학과시험에서 불합격되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을 텐데, 다행히 좋은 성적을 받았고 어려웠던 중국어도 쉽고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그 고마움을 늦게나마 전하고 싶다.

'왕 선생님, 장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왕 라오스, 쟝 라오스 페이창 깐 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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