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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서 만난 밤송이
작성자 :  장은경 작성일 : 2012-10-04 조회수 : 1756

산책길에서 만난 밤송이

장 은 경

해인사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삼분의 일 지점에 오른편으로 아담한 교정과 운동장이 보이는 학교가 있다. 작년 3월에 내가 근무했던 S중학교이다. 전교생은 1,2,3학년 합쳐서 80여명이다. 예전에는 한 학년에 4반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학년별로 한 반 뿐이다. 그나마 여름방학이 지나고 오니 서너 명은 대구나 다른 도시로 전학을 가버렸다. 교직원도 다 합쳐서 16명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선생님들과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다함께 점심을 먹는다.

 

식사를 하고 바로 과학준비실로 향하려고 하니 뭔가 허전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더 없이 푸르고 맑다. 따가운 가을 햇살을 손 가리개로 가리고 교문으로 향하는 내리막 아스팔트길을 산책할 겸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천천히 맑고 깨끗한 공기를 느끼며 걸어가고 있는데, 몇 발자국 앞에 무엇인가가 보인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보니 밤송이다. 뾰쪽한 가시가 두려워 슬리퍼를 조심해서 양쪽으로 발을 모으고 밤송이를 벌려본다. 그 안에는 작고 앙증맞은 알밤 삼형제가 나를 올려다본다. 어젯밤에 중3 작은아이랑 함께 중간고사 시험 본다고 공부했던 한시가 떠오르며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떠오른다.

 

栗(률:밤)

一腹生三子하니(일복생삼자: 한배에 자식 셋이 생겼으니)

中者兩面平이라.(중자양면평: 가운데 놈은 두 볼이 평평하구나.)

秋來先後落하니(추래선후락: 가을이 오면 앞 다퉈 떨어지는데)

難弟又難兄이라.(난제우난형: 아우라 하기도 어렵고 또 형이라 하기도 어렵네.)

 

위의 한시는 조선 선조 때 문장가인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지은 것이다. 그는 시에 재능이 있었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선조 때 문장 8가의 한사람으로 불리웠다. 한시는 읽고 풀이할 때 일정한 규칙이 있는데, 5언시는 '2자/3자'로 끊어 읽고 풀이하면 용이하다. 한시는 매우 함축적이고 정제된 언어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풀이를 할 때 신중해야 하고, 주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충분히 음미해야 제 맛이 우러난다. 그래서 한 번 더 음미하며 그 뜻을 쉽게 풀어본다.

 

알밤삼형제

동그란 밤송이 안에 알밤삼형제가 나란히 들어 있는데

가운데 것은 양쪽의 것에 비해 그 모양이 특이하다.

한 면은 동그랗고 또 한 면은 평평한 가장자리의 밤에 비해,

가운데 놓인 밤은 양 옆의 밤톨 때문에 양면이 모두 평평하다.

가을이 되면 밤톨이 토실토실 살이 오르고 밤송이는 저절로 벌어지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땅을 향해 떨어지니

어느 것이 형이고 아우인지 알 수 없네.

 

가을날 밤톨 하나에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한시를 쓴 이산해가 존경스럽다. 작은아이는 시험범위 속의 한시라서 그 맛과 의미를 단순히 암기의 대상으로만 받아들였지만, 오늘 산책길에서 만난 밤송이는 시공을 초월하여 성큼 내게로 다가온다.

 

알밤 삼형제 중에 유독 중간에 끼인 녀석에게 마음이 간다. 좁고 답답한 공간에서 다른 형제에게 좋은 자리 다 내어주고 평평하게 양면을 모으고 고난과 어려움을 안으로만 삭히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그저 나만 힘들고 어렵다고 투정부리고 좌절하고 우울해 했던 평소의 내 모습과는 차원이 다르다. 중간의 밤톨을 주머니 속에서 오래도록 만지작거리며 나도 그런 모습을 닮고 싶다. 삶에 이리 치고 저리 치는 중년들에게 이제 그만 평평한 삶을 살아가라고 하는 것 같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온전히 좋은 자리는 내어 주고 남은 자리에 만족하고 내실 있게 살아가라고 중간 알밤이 나즈막히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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